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 (문단 편집) == 경기 전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190032912801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6-19&officeId=00032&pageNo=28&printNo=16464&publishType=00010|이변의 드라마를 꿈꾸며]] 옆의 링크는 당시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이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쓴 기사이다.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은 네덜란드 기자가 최소 2:0 이상 승리를 예상했는데, 다른 외국 기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한국은 그것이나 기대해 보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해외 축구 자체에 대해 매우 무지하기 짝이 없었으며, 당시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환경도 열악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나 방송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뇌피셜]]만 가득찬 '''[[축알못]]스러운''' 기사들만 주구장창 골라서 쏟아냈다. 한편 어떤 무속인[* 1차전인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전에서 한국이 1:3으로 패한다고 예언했는데, 운 좋게 적중했다.]은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네덜란드에 3:1로 이긴다고 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1600209114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6-16&officeId=00020&pageNo=14&printNo=23908&publishType=00010|네덜란드에 3:1승리 무속인]] 그나마, 유일무이하게 꿈이나 깨라고 예언 수준으로 예측한 것은 딱 하나 뿐인 [[시사저널]]이었다.[[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나오듯이 시사저널은 '다들 단꿈에 취했는데 한국축구 수준으로 월드컵 16강은 커녕, 1승도 불가능하다.' '잘해야 1무 승점 1점 거둔다.' '이번 월드컵은 승점 1점 1무 2패가 고작이며 네덜란드에게 한국은 4골차 이상으로 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까지 해 버렸다. 이러자, 시사저널은 당시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하지만, 경기 후에 경악스럽다고 독자들이 뭔 예언이라도 했냐고 반응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고 인터뷰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200009911701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8-06-20&officeId=00009&pageNo=17&printNo=10092&publishType=00010|최용수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 기사들 제목은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44년 한 꼭 16강 간다"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아주 드물게 있긴 있었다. 확실히 상대하는 3개국 중 제일 강팀이 네덜란드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일본이 0:1로 석패했지만 그나마 선전하는 것을 봤는데다 현지 유럽 언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볼일 없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그렇게 됐을 이유도 있다지만 그 당시엔 2002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약속을 한 전례가 있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N19962153-00_01055005.jpg|width=100%]]}}} || ---- 1996년에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2000173_30711.html|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60200289102005&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6-02&officeId=00028&pageNo=2&printNo=2577&publishType=00010|김영삼 전 대통령 하시모토 류타로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 한국은 결승 진출 문턱에서 독일에 발목이 잡혔고, 일본은 [[미야기 스타디움]]에서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0:1 일격을 당하며, 결승 진출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럴 정도였으니 당연히 당시 [[대한축구협회]]나 기자들도 지금보다도 더더욱 현실파악을 전혀 못하던 시절이고, 아무래도 욕을 하던 말던 좋던 나쁘던 조회수 유도와 발행 부수 증가와 트래픽 유도를 위하여 일부러 관심성 기사를 써대는 게 예나 지금이나 흔한 기자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유럽 언론은 [[차범근]] 전 감독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자신을 질타하는 한국 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실망스럽다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1700289119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8-06-17&officeId=00028&pageNo=19&printNo=3221&publishType=00010|차범근 전 감독 압박 한국 관중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온 말이다. 비록 당시 벨기에는 대부분 30대가 넘은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사실상 홈팀이었고 [[한일전|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겨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유럽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그리고 4년 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잡았다.[* 이전 글에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E조|E조]]의 톱시드가 벨기에라고 기재됐는데, 완전 잘못된 정보로 이때는 시드 7위 네덜란드가 엄연한 톱시드 국가였다. 그 위로 루마니아, 아르헨티나,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독일 순이였다. 물론 당시 FIFA 월드컵 계수는 벨기에가 더 높았지만, FIFA 랭킹에서 벨기에가 당시 41위로 많이 쳐지면서 FIFA 랭킹에 밀려 톱시드에 들지 못해 32개국 중 11위에 머물렀다.][* 참고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때 FIFA 랭킹은 그야말로 가관이였는데, 벨기에게 FIFA 랭킹 41위로 당시 31위인 대한민국보다 낮은 것도 코미디일 뿐더러 일본의 FIFA 랭킹은 18위로 19위인 아르헨티나(!!!)보다 더 높았던 것. 심지어 당시 스페인을 이긴 나이지리아의 FIFA 랭킹은 71위였다.][* 1994년 대회에서는 벨기에가 톱시드를 받았고 네덜란드는 비톱시드 유럽 포트였지만 4년이 지난 이 대회에서는 두 팀의 입장이 뒤바뀐셈이다.] 심지어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 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나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고, 팀 내에 흑백 갈등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차범근]] 전 감독의 아들 [[차두리]]는 한때 스포츠 기자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1998년 당시 아버지를 반쯤 매장에 가까운 기사를 써재낀 [[기레기]]들에게 학을 떼고 꿈을 [[축구선수]]로 바꿨다고...] 정작 차범근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고 말했다.[* 이것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수준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긴 했지만, 이미 1패를 안은 상황에선 딱히 방법이 없었고, 저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목표였다.] [[최용수]]는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의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반드시 결승골을 넣고 마르세유에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 2022년(월드컵 본선 이전)의 척도로 따지면 [[황의조]], [[황희찬]], [[조규성]] 등등의 공격수가 [[해리 케인]], [[모하메드 살라]],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급의 선수와 자신을 비교하며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드러내 보인 격이다.--황희찬은 잘하면 가능해 보이는데-- 자신감을 표현하여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절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냉정히 보면 실력차가 현격한 상대를 두고 가능성 낮은 필승을 장담한 셈이 됐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1900329128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6-19&officeId=00032&pageNo=28&printNo=16464&publishType=00010|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아무튼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같은 언론의 유언비어 보도를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 네덜란드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였고, 해외 축구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축구 전문가들 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른바 [[축빠]]들은 흔히 축구 잘 하는 나라라 하면 월드컵 단골 손님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 이 4개국 대표팀은 그 당시로서도 모두 월드컵에서 이미 2차례 이상 우승한 경험이 있다.],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 심지어는 네덜란드가 세계 지도의 어디에 있는지나 어느 대륙에 속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 네덜란드가 있어서 그걸로 아는 사람은 있었다. 사실 네덜란드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는 인지도가 좀 낮아서 그렇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대항해시대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난학이라는 단어도 네덜란드 학문이다. 물론 네덜란드 축구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당연했다. 인터넷 시절도 아니니 정보 파악은 어려웠다.] 게다가 [[KBS]]에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예선도 몇 경기 골라서 중계해줬고, 축구 잡지 베스트 일레븐에서는 본선 32개국 진출 예상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스타일까지 소개할 만큼 나름의 정보 제공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계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한국 언론들 및 이를 믿었던 한국 국민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일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 FIFA 월드컵 서독]]과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전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2:3으로 석패했지만, 이 경기는 전반전 내내 0:0으로 팽팽히 맞선 데다가 후반전에 들면서 0:2로 뒤지고 있다가도 곧바로 2:2까지 따라붙는 근성까지 보여주었을 정도로 대회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오렌지 삼총사]]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오렌지 삼총사]] 외에도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형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 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0&dirId=10010101&docId=45855207&qb=OTgg7ZSE656R7IqkIOyblOuTnOy7tSDrhKTrjZzrnoDrk5wg66qF64uo&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Jphrc5Y7u4ssa17MnGssssssto-323351&sid=U7pYonJvLCIAAF1RIfc|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은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최강의 타겟맨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다만, 클라위버르트는 벨기에전에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하면서, 한국전과 멕시코전은 결장했다.],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와 [[프랑크 더부르]]-[[로날트 더부르]] 형제[* 일란성 [[쌍둥이]]다.],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은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쿠]], 캄펜의 바위라 불리며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하는 수비수 [[야프 스탐]],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월드 클래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골키퍼까지도 완벽했던 것이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다. 한마디로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는 '''네덜란드 2번째 전성기'''였던 것이다.[* 첫 번째 전성기는 위에 언급된 [[UEFA 유로 1988|유로 1988]]이었다.] 각종 게임이나 TV, 영상 매체로 축구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 세대 입장에선 당시 각 리그 레전드들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의 압도적인 스쿼드다. 게다가 차범근과는 경험과 능력면에서 매우 뛰어난 [[거스 히딩크]]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한국과는 차원이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은 각각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1994-19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이뤄낸 [[AFC 아약스]] 출신의 멤버들로 조직력 또한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석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이 대회 이후 사임한 것도 '''저렇게 훌륭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4강 그것도 4위에 그쳐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네덜란드가 콩라인만 아니었다면 우승을 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스쿼드인 것이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비단 유럽 축구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무지한 시기였기에[* 그나마 월간축구(현 [[베스트 일레븐]])를 통해서 유럽축구가 조금은 알려지긴 했다.] 많은 국내의 축구팬에게 네덜란드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던 시절이다.[* 그나마 해외 유선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재외교포들이나 유럽에 거주하는 축구팬들은 대한민국이 1점~2점 차로 진다면 정말 잘 한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도 자막의 다비즈의 로마자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즈?"라고 잘못 발음했을 정도로 나름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유럽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파라과이, 멕시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5골이나 넣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여준 팀이다. 즉, 당시 16강 정도의 전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도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한 것은,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전을 앞둔 한국에 [[펠레]]는 컬럼을 통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경기지만 그렇다고 수비만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며 하지만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이 잘 못하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해외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부 국내팬들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 시간에 자신들의 연습 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 연습을 계속 해댔고,[* 놀랍게도 다른 유럽,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 같으면 노발대발 하면서 항의를 해야 정상인데 한국은 네덜란드 측을 향해 항의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선수나 선수단들이 뭘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는 안일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 때부터 승부가 판가름나기 시작한 건 당연지사였다.][* 사실 이는 당시 선수단이 경험이 부족해서 제 목소리를 못 낸 탓도 있다.]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국 선수들은 0:1로 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히딩크의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 [[거스 히딩크]]는 이를 한국 대표팀에도 적용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에도 연습 시간이 지났음에도 연습장을 내주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한국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60% 정도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한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홈 그라운드 이점으로 붉은색 옷을 입은 한국 응원단이 압도적인 숫자로 나와서 응원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한국은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